다시 블로그를 쓸 수 있는 마음 상태가 됨에 감사하다.
어떤 일이 있었는지 전부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.
압축해서 말하면 나는 어떤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몇 개월 간 극심한 가스라이팅을 당했던 것 같고 후유증도 남아있는 것 같다.
나는 누군가 나에게 그렇게 화를 낼 만한 일을 한 적이 없었지만 그 사람의 화를 온전히 받아냈고 스스로 바뀌려고도 노력했고 상황을 바꾸려고도 했다. 살면서 그렇게 참아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. 지내는 내내 내가 바뀌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. 그렇게 시간이 꽤 지나자 내가 무엇을 좋아했는지 뭘 하던 사람인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.
지금 와서 돌아보면 왜 화를 내는지 이해하려 하지 말았어야했다. 그런 사람도 있다는 걸 받아들이고 피했어야했다. 굳이 나를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. 나한테 화를 내면 똑같이 화를 냈어야했다.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화를 내는데 이해하고자 시간을 너무 많이 쓴 것 같다. 관계는 나혼자 바꾸려고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닌데.
뭔가 잘못됐음을 느끼고 모든 것을 정리했을 땐 마음상태도 상당히 피폐했을 뿐더러 관계 속에 스스로 바뀌려 했던 부분들이 누적되어 '나'라고 여기던 나의 정체성의 상당 부분이 남아있지 않았다. 뭘 좋아했는지 평소엔 뭘했는지 뭘 하려했는지 기억이 전혀 나지 않았다. 내 속이 텅 비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.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.
다행히 친구 하나가 내 사정을 알고 있었는데, 그 때 이 이야길하자, 다시 찾을 수 있고 다시 채우면 된다고 말해주었다. 그 친구의 말이 참 고마웠다. 마음 속 깊이 위로와 응원이 되었다. 그리고 그 고통스러운 관계에서 벗어나 평온한 상태 그 자체를 만끽하기로 마음 먹었다.
지금은, 그 사람의 사진만 봐도 무섭거나 두근대거나 하루종일 편히 쉴 수 없는 상태가 되는 정도는 아니다. 교훈만 남기고 감정은 잘 정리하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. 그런데 후유증이 남아있는 것 같다. tv에서 누군가가 소리치거나 화내는 장면을 보이 힘든 것은 물론이고 나에게 누군가가 큰 소리로 말할 때도 무언가 반응이 있는 것 같다.
주말에 동생과 여행을 다녀왔는데 여행 중에 동생이 내 이름을 크게 부르면서 말한 이후로 내내 멍했다. 그 날 스스로 멍한 건 알겠는데 왜 그런지 잘 파악이 안되고 있었는데, 동생이 그런 나를 보더니 아까 소리친건 화낸게 아니고 언니를 몇 번 불렀는데 돌아보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했다. 나를 보며 예전에 같이 일했던 가스라이팅 당해서 주눅 들어있던 동료를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. 그제서야 내가 왜 멍한 상태에 있는지 설명이 되는 것 같았다. 인지한 후에는 멍한 상태가 괜찮아졌다. 동생은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며 속상해했다.
모르면 더 좋았을, 몰랐어도 될 경험이었지만, 그 과정을 통해 상담을 시작하게 됐고 나에 대해 더 알아가고 있다.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지지해주는지 알게됐고 타인이 나에게 얼마나 침범하는 것을 허용해야하는지 선을 정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걸 알게됐다.
내 세계의 땅이 더 단단히 굳고 있다.